영화 '미드소마' 는 주인공 다니가 가족은 죽고 애인과의 관계마저 불안정한 상황에서 스웨덴 하르가 마을 축제에 참여하면서 발생하는 이야기를 다룹니다. 이방인들이 점차 사라지고, 주인공 다니는 그 마을축제의 메이 퀸으로 추대되고, 마지막엔 남자친구 크리스티안을 희생제물로 선택하는 장면으로 끝맺습니다.
미드소마의 숨은 통찰
우리는 이 영화의 첫 부분을 다시 기억해봐야 합니다. 다니는 어떤 상실감을 겪었나요? 가족은 죽고, 애인과의 관계도 틀어지게 되면서 다니는 정체성의 혼란, 심리적으로 몹시 불안정한 상태가 됩니다. 이렇듯, 정서적으로 불안정한 다니는 하르가 공동체에서 처음으로 온전히 ‘자신의 존재가 수용되는’ 경험을 합니다. 하지만 이것이 진짜 존재감의 인정일까요? 다니는 그 어느곳에서도 자신의 마음을 이해받지 못하고 공감받지를 못합니다.세상에 나 혼자 밖에 없다는 외톨이같은 심정으로 살아가죠. 사람들의 마음에 벌어진 틈 사이로 연대감, 유대를 강조하는 집단이 흘러 들어가기 쉽습니다. 인간이란 자신을 이해해주는 사람을 만나면 쉽게 무너지게 됩니다.
우리는 다니의 심리상태를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다니는 불안정한 심리상태였고, 그로 인해 자신의 마음이 누군가에게 수용되며 이해받기를 원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한 개인의 고통이 집단 속에서 수용되면서 자신의 개인적인 자율성, 정체서은 점차 상실되어 갑니다. 다니의 미소는 새로운 가족을 얻은 만족스런 표정이 아닌, 자신의 고통을 집단속에 묻어버린채, 자신의 정체성이 소멸되는 순간일지도 모릅니다. 한 개인의 생각,의지가 집단문화 속으로 귀속되면서 본인은 기존의 불안,고통으로부터 해방되는 듯한 생각을 하게되지만, 과연 그것이 진정한 해방일까요, 영화는 우리에게 그렇게 되묻습니다. 하르가는 다니의 고통을 함께 나누는 듯 보이지만, 실상은 개인의 감정을 집단의 의식에 종속시킵니다. 다니가 크리스티안을 희생하는 장면 역시 자신의 의지가 아닌 공동체 논리에 순응한 결과입니다. 이 영화는 트라우마가 치유된 게 아니라, 새로운 억압으로 전이되었음을 보여줍니다.
다니처럼, 심리적으로 불안정할 때 무엇인가에 기대고 싶은 마음이 들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자신이 나로서 살아가려면 주체적으로 본인을 지탱해야 합니다. 타인에게 의지하거나 기대면, 성장 발전할 수 없습니다. 다니는 자신을 추앙하고 받들어주는 무리들에게 귀속되면서 자신을 점차 잃어갑니다. 자신의 자율의지, 존재감을 스스로 만들어야 하지만, 마음이 약해지면서 흔들리게 되는것이죠. 꼭 집단에 귀속되는 것만 있는 것도 아닙니다. 마음이 불안하고, 우울할 때, 우리가 쉽게 유혹에 빠지는 것은 술, 담배, 유흥입니다. 자극을 쫓아서 빠져들게 되는것이죠. 그렇지만, 그 과정이 지나면 심한 허탈감이 밀려들 수 밖에 없습니다. 다니는 스스로 자존감을 올리고 자신의 정체성을 만들었어야 합니다. 자신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방법으로, 글쓰기, 책읽기가 좋습니다. 영화 미드소마를 보면서, 다니가 자신의 정체성을 만들어가는 장면을 본 기억이 없습니다. 자, 다시 영화속으로 가보겠습니다.
밝은 대낮, 순백의 의상, 아름다운 자연. 미드소마는 전형적인 어두운 공포 대신 눈부신 밝음 속에서 끔찍한 폭력을 펼쳐 보입니다. 관객은 이 아름다움에 점점 익숙해지며, 그 안에 숨겨진 공포와 폭력이 둔감해집니다. 잠깐 방심했을 때, 엄청난 공포가 담긴 영상이 나옵니다. 이 영화를 보면서, 몇번이나 눈을 감았는지 모릅니다. 상당히 자극적인 영상이 나옵니다. 특히 나이가 어느 정도되면, 절벽에 올라가서 바위 아래로 떨어지는 이 마을의 관습은 정말 끔찍했습니다. 바위에 부딛친 얼굴이 화면에 나오는데 끔찍했죠. 영화는 "아름다움"과 "공감"이라는 이름 아래 숨겨진 위선을 경고합니다. 요즘 세상에서 정말 끔찍한 폭력은 이렇듯,무감각하게 다가오는 것입니다. 무감각의 폭력, 우리 일상 속에서 조용히 스며드는 가스라이팅도 다르지 않습니다. 가스라이팅이라는 심리조작도 결국은 정신적 폭력이고, 지속으로 심리폭력을 당하게되면 트라우마가 발생해서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 PTSD 증상이 생길 수 있습니다.
마무리 정리
미드소마를 단순히 트라우마 치유의 이야기로 보는 건 너무 얕은 해석일지 모릅니다. 다니는 기존의 고립에서 벗어난 듯하지만, 결국 또 다른 집단이라는 감옥에 갇히게 됩니다. 이 영화는 우리가 쉽게 미화하는 '연대'와 '공감'이 때로는 개인의 자아를 집단에 종속시키는 위험한 얼굴도 가질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진짜 연대는 개인의 고통을 집단에 흡수시키는 것이 아니라, 자아를 잃지 않으면서 서로를 지지하는 것. 미드소마는 그 진짜 연대를 찾지 못한 채, 또 다른 억압에 안주하는 인간의 불안한 모습을 비추고 있습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한 인간의 존재감, 정체성을 잃어가며 연대의식을 만드는 것은 집단문화일 뿐입니다. 개인이 옳바른 생각으로 살아가지 못한다면, 그것은 인간으로의 존엄성을 상실한 것이죠.
저는 영화 미드소마를 보면서, 집단문화와 개인주의를 비교해서 생각해봤습니다. 자신의 정체성을 잃거나, 또는 개인의 존엄성, 존재감을 앗아가는 집단문화가 있다면 저는 배척하고 대결하고 싶습니다. 한 개인이 개인의 존엄성을 지키며 살아가는 것이 진짜 생존하는 방법입니다. 집단속에 자신을 슬쩍 넣어서 연명하며 살아가는 것은 비굴하고 비겁한 일이라 생각합니다. 영화 미드소마의 다니의 미소가 잊혀지지 않습니다. 과연 다니는 행복했을까요? 아니면, 구조를 바라는 미소였을까요. 저는 다니가 그 집단속의 거짓 행복을 박차고 나와서 나로서 살아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